"대동아공영권의 가장 건실한 신 질서를 건설해야만 될 것은 유구한 인류 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중대 사명으로...... 좀 더 솔직하고 좀 더 용감하게 신체제 건설에 희생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 특히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활동은....... 민족협화(民族協和)의 신흥제국(만주국)에 있어서 가장 솔직한 자기반성으로 이 운동의 광휘 있는 실천은 장래 선계(鮮系,조선인) 국민에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반드시 좋은 영향을 가져오리라고 봅니다."
- 「삼천리」1940년 12월호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설에 조선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하는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이었다.
문교부장관과 서울대.성균관대.영남대.동국대 등 여러 대학의 총장을 지낸 이선근이 이 글을 쓴 장본인이다.
이선근의 친일 활동은 만몽산업의 상무 이사로 있으면서 관동군의 군량미 충당에 협조한 점이 그 첫째다. 그의 대표적인 친일 행적의 하나로 동남지구특별공장후원회 활동을 들 수 있다. 1940년 10월 만주국 수도 신경(창춘)에서 발족된 이 단체는 선비(조선인 항일세력), 토비(만주 토착 항일세력) 등 이 지역의 항일세력들을 토벌하던 관동군을 측면에서 지원한 조선인 주축의 대표적 친일 조직이었다.
당시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있던 최남선은 이 단체에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선근은 당시 협화회 봉천성 대표 서범석 등과 함께 상무위원을 지냈다.
해방 후 이선근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문교부 장관, 성균관대 총장 등을 거쳐 박정희 정권에 다시 줄을 대는데 여기에는 '만주 경력'이 작용한 점이 없지 않다. 박정희 정권은 만주군관학교와 만주국 관리양성소인 대동학원 출신 등 만주 인맥에 권력 기반의 한 줄기를 두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 총리를 지낸 최규하 전 대통령도 대동학원 출신으로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바 있다.
그는 1983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단 한 번도 뉘우치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오히려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묻혔다. 그의 외아들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원자력공학자이며, 두 손녀는 대학 교수와 방송사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다.
친일파의 한국현대사,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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