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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소년들

엄마 생신에 화관을 선물한


촉망받는 권투 선수였던

재키


1972년 어느 일요일

소년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700년 넘게 영국의 지배를 받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나라'

아일랜드


1921년

비소소 독립 정부를 수립하지만

영국계 이주민인 신교도가 많아

영국령으로 남은 북아일랜드


아일랜드인에게 가해지던

교육, 고용, 선거 등의 차별


1972년

어느 일요일


광장에 모여 시작된

차별에 맞선 행진


그때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영국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14명의 아일랜드인


희생자 중 절반이 십 대 소년이었던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 1972.1.30)


영국 군인들이 먼저 공격을 받았으며

사망자들은 총기를 가지고 가까이 접근했다

     - 사건 발생 후, 영국 정부가 발표한 <위저리 보고서> 中


'총기를 소지한 어린 폭도들에 대한 영국군의 정방방위'로

규정한 영국 정부


그러나

"'총에 맞았어요. 총에 맞았어요'라고

외치면서 소년은 울고 있었어요."


"케빈이 총에 맞기 몇 분 전 제 옆에 있었는데...

어떤 무기도 가질 시간이 없었어요."


"존이 총에 맞은 소년을 구하려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총소리가 들렸고

존은 그렇게 죽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던

'비무장 상태에서 달아나거나 부상자를 돕다 숨진'

소년들


진실을 위한 계속된 외침에도

변합없는 영국 정부


무력시위로 돌아선 아일랜드인들


1972년~1998년

아일랜드인 3천여 명

영국 군인 천여 명이 사망하고서야 타결된

양국 간 평화협정


'영국의 직접 통치를 종결하고 자치제도를 도입하며

아일랜드 무장단체를 무장해제한다.'

     (성금요일 평화협정, 1998.4.10)


그리고

26년 동안 거짓 논란이 계속된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해

재조사를 지시하는 영국 정부


1,400명의 증언 청취

약 3,500억 원의 비용

장장 12년에 걸친 조사로 완성된

새로운 보고서의 결론


아일랜드 시위대 중 누구도

영국군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고

무기로 위협하지 않았다

     - 2010년 발표된 <새빌보고서> 中


38년 만에 밝혀진 진실


그리고

"피의 일요일 사건은

정당하지도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정부와 이 나라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그 시각

시민 1만여 명이 모인

북아일랜드 광장


그곳에 울려 퍼진 함성


"진실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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