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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황도불교 건설' 외친 불교계 거두, 친일 승려 제1호 이종욱

1929년에는 각황사에서 개최된 승려대회에서 의안심사위원 7인 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대회 부의장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31본사의 하나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본사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는 주요 승직 가운데 하나였다. 이 무렵의 그는 총독부의 회유로 이미 친일로 기운 상태였다.

 

중일전쟁 발발 1주일 만인 1937년 7월 15일, 이종욱은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했다.

 

1940년 2월 창씨개명이 시행되자 이종욱은 일본 고노에 내각의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의 성을 따서 히로타 쇼이쿠로 창씨개명했다.

 

1941년 8월에 이종욱은 승려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 불교의 총본산 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산 명칭을 태고사(오늘날 조계사), 종명을 조계종으로 고치고 종무부장(오늘날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이로써 이종욱은 조선 불교의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다.

 

조선 내 사찰과 승려들을 줘어짜서 모은 5만 3,000원을 갖고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투기 1대 구입 대금으로 헌납했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조선 내 1,500여 사찰에 12월 15일부터 일본군의 연전연승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라고 명했다.

 

이종욱은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 시절을 포함해 두 차례 동국대 이사장을 지냈다.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 있던 그의 아들 이재창은 동국대 불교대학장을 거쳐 동국대 명예교수, 천대불교문화연구원장, 금강불교학원 이사를 거쳐 2004년 7월 제200회 이사회에서  동국대 이사로 선임됐다. 이종욱을 시작으로 이 집안은 4대에 걸쳐 동국대와 인연을 맺고 있다.

 

 

 

 

 

 

 

 

 

친일파의 한국현대사, 정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