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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시인 김동환

시국은 점점 긴장하여가고 장기전의 체제는 점검 굳어가고, 그리하여 국민총동원의 추(秋)는 다다랐도다. 우리는 일체의 힘을 합하여, '전쟁에 이깁시다. 국책의 선(線)에 연(沿)하여 일체의 동작을 합시다'.

1938년 5월에 발간된 <삼천리> 창간 10주년호 '편집후기'에서 김동환은 자신의 향후 노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같은 호 기명칼럼 '시평'에서는 "이제 제국은 아세아의 번영과 행봉을 위하여 대지(對支) 응징의 전쟁을 기(起)하고 있다. .... 자식과 조카를 단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군문(軍門)에 보내야 할 것이라며 지원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했다.

 

지원병을 찬양한 <1천 병사의 삼(森)>에서는 "저마다 폐하의 무궁한 성대(聖代)를 노래 부르는 젊은 건아"로,

<고란사에서>라는 시에서는 대화(大和)의 처녀가 사라져 가버린 뜰에 나 홀로 서성거리며 어조영의 망치소리에 천년 역사를 회상"하며 부여신궁 근로봉사의 감격을 읊었다.

조선인 학병 동원이 시작되자 <매일신보>에 '권군취천명'이라는 시를 통해 "번듯하게 사는 길이란-제 목숨 나랑 바쳐, ....  군국에 바칠 때일세"라며 '성전'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김동환의 대표적인 친일 행적으로는 그가 주동이 돼 1941년 8월 25일 임전대책협의회를 발족시킨 사례가 꼽힌다.

 

해방 후 김동환은 친일 행각을 뉘우치면서 반민특위에 자수했다.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은 그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의 셋째아들 김영식은 1994년 부친의 평전을 펴내면서 부친의 친일 행적에 대해 대신 사죄한 바 있다. 선대를 대신해 후손이 사죄한 것은 김영식이 처음이다.

 

 

 

 

 

 

 

친일파의 한국현대사, 정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