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억

'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

... 이 사건은 동아일보사 차원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체육부 소속 이길용 기자 개인의 애국심에서 비롯한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

'급히 동아일보사는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데서 오는 쾌(快)와 「동아일보」가 정간되거나 영영 문을 닫게 되는 데서 나는 실(失)을 생각하여 그 답은 분명했다.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전」, 1976

 

"이번에 건강이 좋지 않아 조선을 떠나시게 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습니다. 각하가 조선에 계시는 동안에 여러 가지로 후정(厚情)을 입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경성방직회사를 위해 특별한 배려를 받은 것은 감명해 마지않으며 깊이 감사 말씀 올립니다. 석별의 정으로 별편(別便)에 조촐하지만 기국(器局)을 하나 보냅니다. 기념으로 받아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김성수가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보낸 편지다.

사이토는 3.1의거 후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이어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가 1929년에 다시 제5대 총독으로 부임했던 인물이다. 처음 부임해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오히려 이전의 '무단통치' 때보다도 더 악랄한 고등 수법으로 식민 통치를 했던 장본인이다.

 

「인촌 김성수전」에는 3.1의거를 두고 "단판승부는 자폭 행위이며 운동은 2선, 3선으로 이어져야 하고 중앙학교를 살려야 한다는 주위의 강권에 의하여 인촌은 2월 27일 고향 줄포로 낙향했다." 고 나와 있다.

 

3.1의거 직후에는 전국의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운동 자금으로 생각하고 출자하라."며 자금을 모집해 그해 10월에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당시 그는 3.1의거 직후 고조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거액의 자금을 모집할 수 있었다. 결국 3.1의거의 '방관자'였던 그가 3.1의거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성수는 일본의 광고주들에게 금강산관광, 기생관광 등의 향응을 베풀기도 했다. 일본인 기생관광의 뿌리가 '민족지' 「동아일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언론학자는 "당시 「동아일보」는 '민족지'를 표방한 채 계열기업의 선전지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혹평했다.

 

김씨 일가는 아직도 '민족지' 「동아일보」, '민족사학' 고려대, 삼양사 등의 거대 세력으로 건재하다.

 

 

 

 

 

친일파의 한국현대사, 정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