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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일제에 굴복한 '직필', 2.8독립선언 주역 서춘 서춘은 일제하 언론인 출신으로 2.8독립선언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초기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독립유공자로서의 공적을 인정할 만하다. 특히 2.8독립선언에 참가한 사실이나 초창기 일제의 통치 정책, 특히 경제 정책을 비판한 사실 등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는 일제 말기에 변절하여 친일 논조의 글을 여럿 썼다.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민족진영 인사들의 변절 행진이 시작되자 서춘도 합류했다. 그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공공연히 찬양했다."현대전에서 교전국간의 경제전이라는 것은 환언하면 협력전이다. 협력! 이것은 정신의 힘이다. 정부가 국민정신총동원 주간을 설치했으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총후(銃後, 후방) 용사다. 국민총력이 있고서야 총후가 공고하다."           ..
"나를 손가락질해다오"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 일제 말 27세의 젊은 나이로 하동군수를 지내면서 저 자신의 출세와 보신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으로 위협까지 했던 저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주신 하동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경상남도에서는 산업부장으로 있던 김대우가 군수회의를 소집해 각 군수에게 공출량을 강제 할당했다. .... 그런데 '죽창' 이야기는 왜 나온 걸까? 공출독려반이 가가호호를 돌며 공출을 압박하자 주민들은 집안 곳곳에 쌀을 숨겨두곤 했다. ... 그러다보니 공출반원 가운데는 죽창을 들고 다니며 창고나 벽 같은 쌀을 숨겨둘 만한 곳을 쿡쿡 찔러보기도 했다. 죽창으로 사람들을 해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공출독려반원들이 죽창을 들고 다니니까 군민들에게 적잖은 위협은 됐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이항녕은 휘하 공출반원들의 ..
독립군 때려잡던 관동군에 군량미를 제공하다. 전 문교부 장관 이선근 "대동아공영권의 가장 건실한 신 질서를 건설해야만 될 것은 유구한 인류 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중대 사명으로...... 좀 더 솔직하고 좀 더 용감하게 신체제 건설에 희생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 특히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활동은....... 민족협화(民族協和)의 신흥제국(만주국)에 있어서 가장 솔직한 자기반성으로 이 운동의 광휘 있는 실천은 장래 선계(鮮系,조선인) 국민에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반드시 좋은 영향을 가져오리라고 봅니다." - 「삼천리」1940년 12월호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설에 조선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하는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이었다. 문교부장관과 서울대.성균관대.영남대.동국대 등 여러 대학..
생선을 미끼로 출세길 잡은 '애국옹', 영덕 갑부 문명기 문명기는 제지업계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광제회'라는 재단법인을 만들어 종이 생산.판매에서 주도권을 확보했다. 그는 이 같은 이권단체를 통해 일제 관헌과 조직적으로 유착관계를 형성했다. 영덕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문명기가 등장한 것은 1935년 4월 육.해군기 각 1대씩의 비용으로 10만 원을 헌납하면서부터였다. 일제는 그를 '애국옹'이라고 치켜세우며 대대적으로 선전에 활용하면서 그가 헌납한 돈으로 구입한 비행기를 로 명명했다. 문명기의 친일 행위는 더욱 노골화되어 조선 전역에서 '1군(郡) 1대(臺) 헌납운동'을 펴자고 주창, 그 자신이 앞장서서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만들어 여기에 1만 원을 기부하면서 대대적인 헌납운동을 벌였다. 1943년에는 '헌함(獻艦)운동', 즉 군함 헌납운동을 제창하고..
항일군 토벌에 앞장선 권력 엘리트, 만주 특무책임자 김창영 김창영은 만주 시절의 대부분을 치안부에서 사무관, 독찰관, 이사관으로 근무했는데 이사관 가운데 조선인은 그가 유일했다. 당시 치안부의 주요 업무는 조선인 치안 단속과 항일군 귀순.토벌공작이었다. 반민특위 조사 과정에서 그는 경찰관의 비리를 감찰하는 직책인 독찰관 시절 만주 동북지구 일대에서 공산당의 항일투쟁 거두 양정우 부대의 대원 700여 명을 귀순시켰고 양정우의 부하로 당시 8사단장이었던 김일성외 수백 명에 대한 귀순공작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밝혔다. 김창영은 또 자신이 파견했던 박차석을 통해 "김일성 부대를 정탐한 결과 당시 김일성 부대는 산중에 천막 4개에 나뉘어 120명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조선인 약 40명, 만주인 80명의 2개 중대였고, 제7단장은 만주인 손장상이며 제8단장은 조선인 최현이..
'황국신민의 서사'로 오른 출세가도, 해방 전 경북도지사 김대우 ... 김대우는 다른 무엇보다도 일제에 대한 충성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 그가 결정적으로 일제의 눈에 든 계기는 총독부 사회교육과장 재직 시절 '황국신민의 서사'를 만든 공로(?)였다. '황국신민의 서사'는 조선의 남녀노소가 황국의 충량(忠良)한 신민이 되겠다는 것을 다짐한 내용으로, 요즘으로 치면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것이다. '황국신민의 서사'는 아동용.성인용 두 종류로 되어 있다. 친일파 전문가인 고 임종국 선생의 주장에 따르면 '황국신민의 서사' 창안자는 친일파 이각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를 수용, 입안하여 총독의 결재를 받아 시행한 실무 담당자는 김대우였다. 이 같은 공로로 김대우는 도 참여관을 거쳐 전북.경북도지사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성인용] 1. 우리들은 황국신..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대를 이어 친일한 민병석. 민복기 부자 민병석의 대표적인 친일은 대한제국 황실의 척족으로서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에 앞장선 사실이다.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앞서 민병석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이로부미를 초빙해왔다. 그리고 1905면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 공로로 육군부장, 표훈원 총재, 시종원경 내대신 등을 역임했으며 1907년 10월에는 대훈이화대수장을 받았다. 1910년 한일병합 당시 그는 궁내부대신,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 자리에 있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격인 시종원경은 낙선재 윤비(순종의 황후)의 백부 윤덕영이었는데, 이 둘은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의 회유와 사주를 받아 '병합반대론'을 무마, 조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완용이 정부대신 담당이었다면 이 둘은 궁중 담담이었다. 한..
죽여야 할 첫 번째 인물, 직업밀정 고등계 형사 선우순.선우갑 형제 선우순은 1919년에 3.1 의거가 터지자 일본인들과 함께 '배역유세단(排逆遊說團)'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을 돌면서 조선인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하였다. 그해 9월19일 중추원 회의장에서 개최된 지방 유력자 모임에 참석해 '조선독립 불능론'을 강연하기도 했다. 선우순은 '내선일체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들(조선과 일본)은 이해관계가 공통(共通)하고 순치보거(脣齒輔車)의 관계이므로 내선인(內鮮人)이 마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혹은 웨일스와 같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대륙 방면으로 발전하고 웅비하는 방법"이라며 일제의 충실한 대변자 역을 자임했다. 선우갑 역시 형 못지않게 악질적인 친일분자였다. 선우갑은 일본 경시청 고등계 형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조선인 유학생 감시자 노릇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