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940) 썸네일형 리스트형 '황도불교 건설' 외친 불교계 거두, 친일 승려 제1호 이종욱 1929년에는 각황사에서 개최된 승려대회에서 의안심사위원 7인 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대회 부의장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31본사의 하나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본사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는 주요 승직 가운데 하나였다. 이 무렵의 그는 총독부의 회유로 이미 친일로 기운 상태였다. 중일전쟁 발발 1주일 만인 1937년 7월 15일, 이종욱은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했다. 1940년 2월 창씨개명이 시행되자 이종욱은 일본 고노에 내각의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의 성을 따서 히로타 쇼이쿠로 창씨개명했다. 1941년 8월에 이종욱은 승려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 불교의 총본산 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산 명칭을 태고사(오늘날 조계사), 종명을 조계종으로 ..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스럽게 살리라, 조선인 첫 신직 이산연 그는 일제하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신직(神職)을 지냈다. 신직이란 일본인들의 조상을 모신 신사에 근무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사찰로 치면 스님에 해당하는, 일종의 종교인이다. 이산연이 신직을 자원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파격적인 채용 조건이었다....일제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꺼리는 신직에 조선인을 채용하기 위해 이처럼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것으로 보인다. 청주신사에서 출사로 근무한 지 2년 만에 이산연은 조선인 최초로 정식 신직으로 승진했고, 이후 해방 때까지 5년 동안 일본신을 모셨다. 매일 평균 1~2회씩 신사 내의 대소 제사를 주관해 집행했으며 틈틈이 일본 가정을 순회하며 집안의 제사를 지내주기도 했다. 이산연은 주위의 조선인들과는 교류를 끊은 채 언어나 의복은 물론 모든 생활양식을 일본식화하고 가족에게..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에 바친 시, 시인 김용제 김용제는 일제하에서 총 세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한 첫 번째 시집 「아세아시집」으로는 제1회 국어문예총독상을 수상했는데 그 상금 가운데 300원을 조선군 애국부에 국방헌금으로 기탁하여 경성대화숙으로부터 '모범사상전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44년 6월에는 세 번째 시집 「보도시첩」을 출간했는데 이는 그가 1943년 5월 말부터 6월에 걸쳐 조선군 보도반원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소감과 각오를 담은 것이다. 김용제의 친일문학은 전쟁문학과 함께 내선일체를 강조한 황도문학으로 대별될 수 있다. 「친일문학론」의 저자인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 선생은 「김용제론」에서 그의 작품 활동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눈 바 있다.첫 째는 1943년 5월에 간행된 두 번째 시집 「서사시어동정」 등 일본의 건..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에 바친 시, 시인 김용제 김용제는 일제하에서 총 세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한 첫 번째 시집 「아세아시집」으로는 제1회 국어문예총독상을 수상했는데 그 상금 가운데 300원을 조선군 애국부에 국방헌금으로 기탁하여 경성대화숙으로부터 '모범사상전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44년 6월에는 세 번째 시집 「보도시첩」을 출간했는데 이는 그가 1943년 5월 말부터 6월에 걸쳐 조선군 보도반원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소감과 각오를 담은 것이다. 김용제의 친일문학은 전쟁문학과 함께 내선일체를 강조한 황도문학으로 대별될 수 있다. 「친일문학론」의 저자인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 선생은 「김용제론」에서 그의 작품 활동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눈 바 있다.첫 째는 1943년 5월에 간행된 두 번째 시집 「서사시어동정」 등 일본의 건.. 사라진 선구자의 꿈, 시인.작사가 윤해영 오색기 너울너울 낙토만주 부른다백만의 척토들이 너도나도 모였네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낙토만주] 제1절 흥안령(興安嶺) 마루에 서설(瑞雪)이 핀다4천만 오족(五族)의 새로운 낙토얼럴럴 상사야 우리는 척사(拓士)아리랑 만주가 이 땅이라네....[아리랑 만주] 중에서 윤해영은 1940년대에 만주국 친일 조직인 협화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친일 의식이 행동으로 형상회된 것이다. 친일파의 한국현대사, 정운현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시인 김동환 시국은 점점 긴장하여가고 장기전의 체제는 점검 굳어가고, 그리하여 국민총동원의 추(秋)는 다다랐도다. 우리는 일체의 힘을 합하여, '전쟁에 이깁시다. 국책의 선(線)에 연(沿)하여 일체의 동작을 합시다'.1938년 5월에 발간된 창간 10주년호 '편집후기'에서 김동환은 자신의 향후 노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같은 호 기명칼럼 '시평'에서는 "이제 제국은 아세아의 번영과 행봉을 위하여 대지(對支) 응징의 전쟁을 기(起)하고 있다. .... 자식과 조카를 단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군문(軍門)에 보내야 할 것이라며 지원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했다. 지원병을 찬양한 에서는 "저마다 폐하의 무궁한 성대(聖代)를 노래 부르는 젊은 건아"로,라는 시에서는 대화(大和)의 처녀가 사라져 가버린 뜰에 나 홀로 서성거리며 .. '팔굉일우' 외친 '불놀이' 작가, 시인 주요한 '조선임전'이라는 글에서는 "지금 시국이 요구하는 것은 행동이요, 희생이요, 무조건의 헌신"으로 "동아의 성전이 조선에 구하는 것은 땀과 피와 살과 생명"이라며 "오직 우리는 (천황이) 부르실 때 바칠 뿐"이라고 했다.일제의 징병제 실시를 맞아서는 "오늘에야 우리를 부르시는 높은 뜻을 서로 전해 말하며 눈물 흘리는 것을......"이라며 감격했다.또 조선인 지원병으로서 최초의 전사자인 이인석의 죽음을 두고는 "보아라, 너들의 피가 내 핏줄을 통해 여기 뿜는다. 2천 3백만의 뜨거운 피가 1억의 피로 한 덩어리가 되는 처음의 피가 지금 내 핏줄에서 콸콸 솟는다....."고 했다.'동의어'라는 시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폐하를 위해 살고, 또 죽는 것만이 즉 사는 것.. '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 ... 이 사건은 동아일보사 차원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체육부 소속 이길용 기자 개인의 애국심에서 비롯한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급히 동아일보사는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데서 오는 쾌(快)와 「동아일보」가 정간되거나 영영 문을 닫게 되는 데서 나는 실(失)을 생각하여 그 답은 분명했다.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전」, 1976 "이번에 건강이 좋지 않아 조선을 떠나시게 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습니다. 각하가 조선에 계시는 동안에 여러 가지로 후정(厚情)을 입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경성방직회사를 위해 특별한 배려를 받은 것은 감명해 마지.. 이전 1 2 3 4 ··· 118 다음